만드는 비용이 떨어지고 판단의 비용이 오릅니다Making gets cheaper, deciding gets costlier.

과거에는 브랜드 아이덴티티 시안을 세 개 정도 보고 골랐습니다. 한 벌을 만드는 데 시간이 들었으므로 시안의 수 자체가 판단의 범위를 정해줬습니다. 생성형 AI를 사용하니 반나절이면 서른 개가 나옵니다. 선택지가 늘어난 만큼 결정이 쉬워지지는 않았습니다. 만드는 비용은 내려갔는데 고르는 기준은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담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앞 단계에서 뒤 단계로 옮겨갔습니다.
시안이 서른 개일 때 회의실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대체로 정해져 있습니다. 각자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우니 인상으로 말합니다. 이건 좀 무거워 보인다거나 저건 요즘 느낌이 아니라는 식입니다.
이런 회의에서는 대개 세 가지 중 하나가 결정을 가릅니다. 직급이 가장 높은 사람의 취향, 목소리가 큰 사람의 확신, 그리고 마지막에 본 안입니다. 셋 다 브랜드가 시장에서 어떻게 작동할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선택지가 적을 때는 이 문제가 덜 드러납니다. 세 개 중에 고르면 각 안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무엇이 다른지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서른 개는 서로 비슷해서 차이를 언어로 만들기 어렵습니다.
서른 개가 세 개보다 넓은 범위를 담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같은 도구에서 나온 결과물은 학습 분포의 중앙 쪽에 몰려 있습니다. 개수는 열 배가 됐는데 다루는 폭은 그만큼 늘지 않습니다.
이 현상은 도구가 퍼질 때마다 반복됐습니다. 약 1만 개 사이트의 화면 227,000장을 분석한 연구에서 웹 디자인은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오히려 다양해지다가 이후 방향이 바뀌었고, 레이아웃 유사도 거리는 2010년부터 2019년 사이 44% 줄었습니다.1 연구진은 소수의 프레임워크와 라이브러리 사용이 확대된 것을 원인으로 지목했습니다.
만들 수 있는 양이 늘어난 시기와 결과가 비슷해진 시기가 겹칩니다. 양이 다양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시안을 앞에 놓고 물어야 할 질문은 어느 것이 좋은가가 아닙니다. 세 가지를 순서대로 확인하면 대부분 걸러집니다.
시장에서 무엇과 겹치는가. 경쟁사와 인접 업종의 아이덴티티를 한 화면에 모아 놓고 우리 안을 그 안에 넣어봅니다. 크몽 리브랜딩에서 노란색을 버린 판단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국내 주요 플랫폼이 이미 노란색을 쓰고 있어 광고를 집행해도 크몽으로 기억되지 않는 조건이었습니다. 이 판단의 재료는 시안 안에 없고 시장에 있습니다.
무엇을 유지할 것인가. 회사가 이미 값을 치른 자산 가운데 시장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버리는 쪽이 비용입니다. 국보디자인 리브랜딩에서 43년 쌓인 브랜드 컬러를 교체하지 않고 톤만 조정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리브랜딩이라는 말 때문에 바꾸는 것이 기본값처럼 보이지만, 무엇을 지킬지 정하지 않으면 고를 기준의 절반이 사라집니다.
어디에 쓰일 것인가. 화면에서 좋아 보이는 안이 인쇄와 사인물에서 무너지는 경우가 흔합니다. 반대로 적용 범위가 좁은 회사에 광범위한 체계를 만들면 쓰이지 않는 문서가 남습니다. 최근 작업한 임상 AI 기업에서 가이드라인을 열여섯 페이지로 줄인 것도 같은 판단이었습니다. 웹 기반 서비스라 물리적 적용물이 적다고 봤기 때문에 봉투와 서류 규격은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시안 바깥의 정보입니다. 서른 개를 아무리 오래 들여다봐도 나오지 않습니다.
기준이 정해지면 시안의 수는 자연히 줄어듭니다. 서른 개 중 스물일곱 개가 첫 번째 질문에서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순서를 뒤집으면 회의가 길어집니다. 시안을 먼저 만들고 그중에서 고르려 하면 매번 기준을 새로 만들어야 하고, 그 기준이 참석자마다 다릅니다. 시안이 많을수록 회의 횟수도 늘어납니다.
국내 조사에서 생성형 AI를 활용하는 디자인활용업체 가운데 디자인 기획 단계에서 쓴다는 응답이 62.5%로 가장 높았습니다.2 도구가 손을 쓰는 단계보다 방향을 잡는 단계에 먼저 들어오고 있습니다. 기준을 세우는 자리에 도구가 들어오면 걸러낼 근거까지 도구가 만든 것이 됩니다.
아래 항목은 고르는 기준 없이 시안이 쌓일 때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두 가지 이상에 해당한다면 기준을 먼저 정할 시점입니다.
만드는 비용이 내려가면 고르는 일의 값이 올라갑니다. 도구는 요청받은 것을 만들고 어느 것을 골라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나열해놓기만 하죠.
듀당스는 시안을 늘리기 전에 기준을 먼저 정리합니다. 시장에서 무엇과 겹치는지, 회사가 지켜야 할 자산이 무엇인지, 어디에 쓰일 것인지를 확인한 뒤에 형태로 들어갑니다. 고를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일이 만드는 일보다 앞에 있습니다.
시안은 쌓이는데 결정이 나지 않고 있다면 듀당스에 문의해주세요.
글 듀당스(Duedance) · 편집 차영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