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안을 버리는 판단The judgment to discard the first draft.

안과에서 출발한 임상 AI 기업의 아이덴티티를 만든다고 가정해봅니다. 어떤 도구에 시켜도 비슷한 것이 나옵니다. 렌즈를 닮은 동심원, 눈동자를 추상화한 원, 계측기의 눈금을 옮긴 격자입니다. 사람이 스케치를 해도 처음 몇 장은 대체로 그쪽으로 갑니다. 이 형태들이 나오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분야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른다는 말은 이미 여러 곳이 쓰고 있다는 뜻입니다.
생성형 AI 모델은 학습한 데이터에서 확률이 높은 패턴을 내놓습니다. 무엇을 만들지에 대한 지시가 느슨할수록 분포의 중앙에 가까운 결과가 나옵니다. 좋은 답이 아니라 자주 나온 답이 먼저 도착하는 구조입니다.
이 구조가 브랜드 작업에서 문제가 되는 이유는 목적이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브랜드는 시장 안에서 구별되기 위해 만듭니다. 가장 흔한 답으로 만든 브랜드는 정의상 구별되지 않습니다.
국내 조사에서도 도구가 어디에 먼저 들어오는지가 확인됩니다. 생성형 AI를 활용한다고 답한 디자인활용업체 가운데 디자인 기획 단계에서 쓴다는 응답이 62.5%로 가장 높았고, 컨셉 디자인 35.1%, 상세 디자인 27.0% 순이었습니다.1 손을 쓰는 단계보다 방향을 잡는 단계에 먼저 들어오고 있습니다. 흔한 답이 가장 앞에서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예전에는 첫 번째 안이 자연히 걸러졌습니다. 빠르게 잡은 스케치는 완성도가 낮았고, 다듬는 과정에서 다른 안과 비교되며 밀려났습니다. 흔한 답이라는 사실이 어설픈 형태에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첫 번째 안이 이미 완성된 형태로 나옵니다. 색과 여백이 정돈되어 있고 적용물까지 붙어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흔하다는 이유만으로 버리기가 어려워집니다. 눈앞의 결과물이 나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판단의 순서가 바뀌어야 합니다. 이 안이 좋은지를 먼저 묻는 대신 이 안이 이미 어디에 쓰이고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순서입니다. 시장에 같은 형태가 몇 개나 있는지는 결과물 안에서 확인되지 않습니다.
크몽 리브랜딩에서는 새 심볼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리브랜딩에서 심볼을 새로 그리는 것은 가장 흔한 선택입니다. 그런데 새 심볼은 그 의미를 시장에 처음부터 설득해야 하는 비용을 만듭니다. 13년 쌓인 이름이 이미 자산이었으므로 이름 자체를 워드마크로 세웠습니다.
같은 프로젝트에서 노란색은 버렸습니다. 국내 주요 플랫폼이 이미 노란색을 쓰고 있어서 광고를 집행해도 크몽으로 기억되지 않는 조건이었습니다. 이 판단의 재료는 브랜드 안이 아니라 밖에 있었습니다. 자기 자산만 들여다보는 방식으로는 도달하지 않습니다.
국보디자인 리브랜딩에서는 반대 방향의 결정이 나왔습니다. 43년 쌓인 브랜드 컬러를 교체하지 않고 톤만 조정했습니다. 리브랜딩이라는 이름 아래 바꾸는 것이 기본값처럼 보이지만, 오래 거래한 고객 기업이 낯설어할 자산을 지우는 것이 손실이라고 봤습니다.
세 건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만들 수 있었는데 만들지 않았거나, 바꿀 수 있었는데 바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안을 그대로 쓰는 것은 개별 회사 입장에서 합리적입니다. 빠르고 비용이 적게 들며 결과물도 나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선택이 모일 때 나타납니다. AI가 제시한 아이디어로 단편소설을 쓴 실험에서 결과물은 더 창의적이고 잘 쓰였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동시에 AI를 사용한 소설끼리는 사람만 쓴 소설보다 서로 더 비슷했습니다.2 연구진은 이를 개인은 이득을 보고 집단의 새로움은 줄어드는 사회적 딜레마로 설명했습니다.
브랜드는 집단 안에서 구별되기 위해 존재합니다. 각자가 합리적으로 첫 번째 안을 택하면 시장 전체에서 아무도 구별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첫 번째 안을 버릴지 판단하려면 결과물 밖의 정보가 필요합니다.
같은 카테고리에서 이미 쓰이고 있는 형태입니다. 경쟁사와 인접 업종의 아이덴티티를 한 화면에 모아 놓으면 우리 안이 그 안에 들어가는지가 보입니다.
우리가 이미 값을 치른 자산입니다. 오래 써온 색이나 이름, 형태 가운데 시장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버리는 쪽이 비용입니다.
그 형태가 앞으로 쓰일 자리입니다. 화면에서 좋아 보이는 안이 인쇄와 사인물에서 무너지는 경우가 흔합니다.
아래 항목은 첫 번째 안이 그대로 넘어갈 때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두 가지 이상에 해당한다면 밖을 먼저 확인할 시점입니다.
만드는 비용이 내려가면 만들지 않기로 정하는 일의 값이 올라갑니다. 도구는 요청받은 것을 만들고 요청이 틀렸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듀당스는 시안을 늘리기 전에 시장에서 무엇과 겹치는지, 회사가 이미 가진 것 중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먼저 정리합니다. 무엇을 만들지 정하는 일이 만드는 일보다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보고 계신 안이 이미 어디에 쓰이고 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면 듀당스에 문의해주세요.
글 듀당스(Duedance) · 편집 차영우